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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의 노닥노닥
장사익 나이 과거 전직 아내 데뷔 본문
장사익은 우리의 소리를 대중에게 가장 잘 표현해 준다고 평가를 받는 대중 음악인이자 소리꾼입니다. 대표곡 '찔레꽃'을 비롯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서사적인 노래들로 70대에 접어든 현재도 대중의 공감을 깊이 끌어내는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사익은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음악인으로 공식 데뷔했을만큼 그의 인생역정 또한 굴곡지고 다양한데요. 장사익은 1949년생으로 올해 74세입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출신으로 광천중학교, 선린상고, 명지대 경영학과를 나왔습니다. 대학은 75학번으로 20대 중반을 넘어 뒤늦게 간 듯합니다.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장사익은 어린시절 소리에 대한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음직 한데요. 돼지 장수였던 아버지는 고향 광천에서 장구 잘 치는 장구재비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린시절 음치에 가까웠던 장사익은 초등학교 시절 웅변 대표로 뽑히며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는 연습을 열심히 하다 목청이 틔워졌다 합니다. 이후 노래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남들 앞에서 곧잘 부르기도 하면서 노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서울에 있는 선린상고를 졸업한 그는 생명보험회사에 입사했지만, 인근 가요 학원에 등록하여 대중가요를 배우며 약 3년간 발성과 코드를 익혔을 만큼 노래에 대한 열망도 컸는데요. 하지만 스스로 가수가 되기에는 부족한 듯했고, 당시에는 가수 데뷔를 위해 돈도 한 두 푼 드는 게 아니었기에 마음을 접었다 합니다.
이후 약 20여년간 15개가 넘는 직업 편력이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일했던 보험회사는 군대(문선대)를 다녀온 후 타회사에 합병되면서 자연스럽게 실직되었다 합니다. 그 뒤 무역회사, 딸기 장수, 가구 외판원, 전자회사, 독서실 운영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마흔이 넘어 마지막으로 갖은 직업은 매제가 운영하던 카센터였답니다.
녹록지 않은 시절을 보내면서도 음악과는 떨어지지 않았는데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종종 듣던 태평소 소리의 영향으로 1980년에는 아마추어 국악단체 한소리회에 가입하여 태평소, 대금, 피리 등을 독학으로 배우다시피 했고, 국악 사람들과 교류하며 연주회도 참여하는 등 음악 활동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배웠던 태평소로 서태지의 '하여가'의 태평소 파트를 연주해 주는 우연도 이루어지는데요. 카센터 재직 시절 종종 차를 고치러 오던 서태지 매니저가 태평소 부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에 마침 태평소를 불던 장사익이 공연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카센터를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하여 태평소를 불기 시작합니다. 그가 속한 농악패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서 대상을 휩쓸며 태평소 연주자로 자리 잡아갑니다.
악기 연주자로 남았을 그가 유명 소리꾼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종종 동료 및 절친들과 어울리던 뒤풀이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가요들을 불러 제꼈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4년 장사익의 노래에 주목한 절친 후배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제의로 서울의 소극장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며 46세의 나이에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이 즈음 결혼도 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아내 고완선은 자신의 팬이자 데뷔 공연기획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장사익의 매니저로서 공연과 활동을 관리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뷔 공연 이듬해 자신의 대표곡이 된 '찔레꽃'이 수록된 1집 음반 '하늘 가는 길'을 시작으로 음반 발매와 공연으로 대중 음악인으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1996년부터 시작된 세종문화회관 공연 및 각종 국내 공연, 해외 공연이 매번 티켓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공연계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와 인기를 얻어 왔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온라인상의 노래 동영상과 자주는 아니지만 인상적인 열창 모습을 보이는 방송 무대로 인해 대중적 인지도의 저변이 넓어져 왔습니다. 2018년에는 전통적인 우리 소리의 대표자로서 평창 동계 올림픽 폐회식에서 아이들과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2015년에 성대결절이 오며 가수로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다행히 수술과 회복이 잘 되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소리꾼으로서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 또한 대금 연주자로서 대를 이어 국악을 이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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